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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의 과학수업

증기의 힘을 이용하다

by 빛나빈나 2022.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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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의 힘은 부엌에서 찌개를 끓이거나 밥을 지을 때나, 주전자에 물을 넣고 가열할 때 열이 물을 분해하여 기화되면서 뚜껑을 밀고 밖으로 나오는 것 등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이 액체 상태에서 기체로 변할 때 분자들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내부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힘을 이용한 것이 바로 증기 기관의 기본 원리입니다.

18세기 이전에는 사람이나 가축의 힘에 의존하거나 물레방아처럼 흐르는 물의 힘을 동력으로 이용했는데, 새로운 증기기관의 등장은 획기적이면서도 미래 산업사회에 매우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습니다. 물이 끓어서 기체로 증발할 때, 그 증기의 힘을 동력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고대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기원후 1세기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이란 사람은 증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물건을 실제로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증기구(蒸氣球)라는 기구인데, 공 모양의 양쪽에 분출구가 있어서 그 구멍에서 수증기를 뿜게 하여 공을 회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증기의 힘을 우리의 생활과 연결시켜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시도는 17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났습니다. 17세기를 2년 남짓 남겨둔 1698년, 영국의 토머스 세이버리가 만든 증기 기관은 실제로 증기의 힘을 이용하여 작업을 하는 장치였는데, 그는 물을 넘치게 하는 증기에서 얻는 흡입력으로 광산의 물을 뽑아 올리는 수동 밸브 펌프를 발명했습니다. 그는 이 증기 기관으로 최초의 특허를 얻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의 파팽(Papin)이 만든 증기 기관도 있었지만, 실제로 사용되었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다트머스의 대장장이였던 토머스 뉴커먼은 세이버리의 증기 기관을 개량하여 훨씬 능률 좋은 증기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뉴커먼의 증기 기관은 당시로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만든 증기 기관은 발명 직후 4년 동안 8개국에 보급되었고, 그가 죽은 1729년까지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사용하였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뉴커먼의 일생을 다룬 글을 보면 그가 난로 위에 끓고 있는 주전자 뚜껑을 보고 증기 기관을 발명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뉴커먼도 그의 뒤를 인은 와트와 마찬가지로 물이 끓으면서 주전자로 뚜껑이 들썩거리는 모습을 보고 증기 기관을 발명했다고 합니다. 증기기관의 발명과 사용은 오랜 역사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업혁명 시기에 증기 기관이 널리 전파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제임스 와트입니다. 와트는 그 이전까지 왕복 운동만 가능하던 증기 기관을 회전 운동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개량함으로써 증기 기관이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는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영국의 산업혁명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 화학의 새로운 혁명

흔히 프랑스의 과학자 라부아지에를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연소 반응에서 산소의 역할을 밝혀냈는가 하면, 원소를 기본 물질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했습니다. 또한 화학 반응 시 물질의 보존 원리를 규명하는 등 근대 화학의 토대를 완성했으며, 화학을 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 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프랑스 혁명 직전에 이루어진 이러한 라부아지에의 업적은 화학의 발전에 너무나도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화학혁명'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1772년, 라부라지에는 연소에 관한 최초의 실험을 했습니다. 이는 앞서 설명한 화학혁명을 향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자 라부아지에에 의한 츨로지스톤(phlogiston)이론의 폐기라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18세기 내내 화학 전반을 설명하는 이론 체계였던 플로지스톤이론은 16세기에 의화학을 창시한 파라켈수스가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17세기 독일의 화학자 슈탈(Georg Ernst Stahl)은 플로지스톤(그리스어로 '불타는 것'이라는 뜻)이 많이 함유된 물질은 그만큼 잘 타며, 플로지스톤은 모든 가연성 물질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고 불에 탈 때 연기와 불꽃으로 빠져 나간다고 여기고 이론적으로 체계화했습니다. 그러나 금속은 불에 탈 때 산화하여 오히려 무게가 늘어나기 때문에 플로지스톤 이론의 반박 증거가 됨에도 무시당하고 있었습니다. 라부아지에는 1772년에 유황, 인 등의 화합물로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실험을 한 다음 '연소 과정에서 플로지스톤은 발생하지 않으며. 오히려 불에 타는 물체가 공기를 흡수하고 또 공기를 필요로 한다'는 가설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또한 물질이 화학변화를 일으키기 전과 일으킨 후에도 전체 무게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을 많은 실험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결론이 바로 '질량불변의 법칙'입니다. 그는 이 연구를 완성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처음 연소에서 공기 중에 함유되어 있는 어떤 물질이 불타는 물질과 결합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결합하는 물질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영국의 프리스틸리라는 화학자가 산소 가스를 발견하고 이를 발표하였습니다. 라부아지에는 이 새로이 발견된 가스가 산소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를 규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고, 드디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공기 중 가장 활력 있고 가장 순수한 요소'를 산소로 정의했으며, 계속되는 연구에 의해 물의 전기분해를 밝힘으로써 공기 중의 연소 이론을 완결했습니다. 이는 화학 반응에서 산소가 하는 역할을 최초로 발견해낸 중요한 업적으로, 화학이 중세 이후의 연금술에서 벗어나 근대 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고 눈부신 발전을 이룬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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