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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의 과학수업

땅과 하늘의 운동법칙을 말하다

by 빛나빈나 2022.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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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힘이 존재합니다. 그 힘이 없다면 우리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그 힘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힘의 성질에 대한 것들은 사실 작은 사건이나 상황을 보고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야구나 축구를 하면서 공을 높이 날리면 하늘을 향해 떠오른 공이 다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무의 과일이 다 익어 무거워지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마 대부분 단순한 자연 현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보고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위대한 발견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이작 뉴턴이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과학자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작 뉴턴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 하나를 보고 정립한 힘에 대한 이론 체계는 아이슈타인이 등장하여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기까지 수백 년 동안 우리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장악했습니다. 흔히 고전역학이라고 불리는 이 이론은 뉴턴의 힘에 관한 세 가지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의 이론은 그동안 학자들이 궁금해 하거나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을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뉴턴은 자신의 이론을 통해 케플러가 제시한 중요한 이론 중 하나인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를 비롯한 여러 행성들이 타원 모양의 길을 따라 공전하는 행성의 타원 궤도 운동을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했습니다.

만유인력을 중심으로 한 그의 역학에 관한 이론 체계는 1687년에 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소개되었는데, 이책은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이 쓴 <종의 기원>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과학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비약적으로 발전된 과학의 혁명적인 변화를 두고 흔히 '과학의 혁명'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뉴턴은 이러한 '과학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그의 이론이 등장하면서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이 완벽하게 설명되었습니다. 또한 갈리레오부터 논의되어온 우주를 지배하는 힘에 대한 이론적인 혁명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뉴턴의 연구 업적들은 이후 호이겐스나 라플라스 등에 의해 더욱 다듬어지게 되었고, 이후 모든 물리과학의 기본이 되었답니다. 나아가 고전역학은 특정한 초기 조건과 물체의 운동을 나타낼 수 있는 공식이 있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20세기에 들어와 양자역학이 성립되면서 상당히 퇴색되었지만, 일상적인 우리의 삶에서는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 지구는 둥글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본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바다의 끝은 낭떠러지 폭포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땅은 평평하여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수평선까지 나가면 그 폭포 아래로 떨어져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바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세계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세계를 보고 온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글로 써서 알리기도 하고 말로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말은 살이 붙고 과장되면서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갈 즈음에는 이미 신화에서나 존재하는 이상향으로 포장되기도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인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인도를 황금으로 가득 찬 환상의 나라로 기억하게 되었고 멀고 먼 인도를 향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땅을 찾아 떠난 사람들 중 스페인 왕실 소유 탐사대의 여행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탐사대는 황금을 찾아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왕실의 후원으로 인도를 찾아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마침내 1492년 10월 12일 벌거벗은 야만인들이 사는 어느 해변에 도착하였습니다. 탐사대의 대장인 콜럼버스는 이 땅을 '구원의 성자'란 이름의 '산살바도르'라고 불렀습니다. 역사적인 이날 신대륙에 유럽인의 발자국을 최초로 찍은 것입니다. 그런데 콜럼버스는 죽는 순간까지도 이 땅을 진짜 인도 대륙이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이 대륙의 현대식 이름은 1497년 브라질을 탐험함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항해기로 신대륙이 널리 알려진 뒤에야 비로소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난 콜럼버스는 어릴 때부터 바다를 통한 여행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10대 후반부터 아버지를 도와 지중해와 아이슬란드까지 가는 항해를 했답니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 제노바의 상선을 이끄는 선장이 된 이후로는 마르코 폴로와 프톨레마이오스 등이 쓴 책들을 탐독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와 연구 기록 등을 읽고 지구가 둥글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하면 반드시 인도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생각에 그치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첫 시도는 1483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포르투갈 왕에게 청원하였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이유로 그의 청원이 거부되었으며, 몇 년이 흐른 뒤 마침내 이웃 나라인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의 원조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드디어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 니냐, 피타 세 척의 배가 인도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은 지금의 바하마 제도의 한 섬이었으면, 죽기 전까지 계속된 네 차례의 항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아메리카 대륙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비록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에게 선물하기로 약속한 엄청난 황금을 찾지 못하고 항해 내내 반란과 질책에 시달렸지만, 황금만큼이나 전 세계 시장을 휩쓴 담배를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네 차례의 항해로 개척한 서인도 항로는 이후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인들의 새로운 진출 무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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